[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33)평신도를 통한 한국 교회의 쇄신, 그 대안은 복음화 3 - 평신도 사도직의 출발점, 회개 ①
주님 계명대로 살고 있는지 자가 점검부터
많은 평신도가 지금도 나름대로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지금 당신 삶의 주인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주님! 주님!” 하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신도는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하느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삽니다. 진정한 평신도는 그분의 선택이 우리의 선택보다 낫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만약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삶 안에서 무엇을 결정할 때 먼저 하느님께 여쭤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함께 일하고 있는 분들과 가끔 식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항상 저에게 먼저 “오늘 식사하러 어디로 갈까요?”라고 물어봅니다. 한 번도 “오늘 어디에서 식사하기로 했습니다. 그쪽으로 가죠”라고 말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으고, 그 의견대로 따릅니다.
우리는 한 인간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사소한 식사 메뉴를 정하는데도 항상 남에게 먼저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잘 여쭤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말씀을 잘 듣고 그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 기도로 청하고 지혜 구해야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주님으로부터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대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분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심지어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합니다.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먼저 그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결정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먼저 달려가서 그분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지혜를 구할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매우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많은 분이 제게 와서 상담하는데 정작 해결책을 이야기하면 따르지 않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해결책을 따르지 않을 거라면 왜 찾아와서 해결책을 달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최종 선택은 본인의 몫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를 요청하거나 상담을 할 때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답을 기대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도 비슷한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지혜롭고, 올바른 분별을 줘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이 글 제일 앞에서 언급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어머니께서 맛있는 밥상을 차려 놓으시고 밥을 먹으라고 부르십니다. 이때 밥을 먹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밥은 억지로 먹여줄 수 없습니다. 음식 맛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야 합니다. 입안에만 넣고 우물거리면 밥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씹어서 먹어야 소화가 되고, 소화되어야 영양분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예수님은 우리 평신도들의 삶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합니다. “정말 새롭게 살고 싶습니다. 주님이 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동기를 유발하실 뿐이지, 직접 살아가는 것은 우리 평신도 각자의 몫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밥상은 이미 예수님께서 잘 차려 주셨습니다. 그 밥상에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잘 소화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난해하고 힘들고 어려운 것을 주문하시지 않습니다. 어려운 길을 걷는 자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계명을 지켜라. 내 말을 들어라. 그러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셔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중삼중으로 완벽한 장치를 해 놓고,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자신의 내면 들여다보기
혹시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자신의 내면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과연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고 있는지,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고 싶은 의지가 내게 있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등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의지와 노력이 부족하면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나서 분명히 자신의 문제점을 고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내 모습을 그분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뉘우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다음 호에서 이 회개의 문제에 대해 복음화와 관련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가톨릭평화신문 2019.07.28 발행 [1525호] 사목영성 논고 전재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33)평신도를 통한 한국 교회의 쇄신, 그 대안은 복음화 3 - 평신도 사도직의 출발점, 회개 ①
주님 계명대로 살고 있는지 자가 점검부터
많은 평신도가 지금도 나름대로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지금 당신 삶의 주인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주님! 주님!” 하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신도는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하느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삽니다. 진정한 평신도는 그분의 선택이 우리의 선택보다 낫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만약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삶 안에서 무엇을 결정할 때 먼저 하느님께 여쭤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함께 일하고 있는 분들과 가끔 식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항상 저에게 먼저 “오늘 식사하러 어디로 갈까요?”라고 물어봅니다. 한 번도 “오늘 어디에서 식사하기로 했습니다. 그쪽으로 가죠”라고 말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으고, 그 의견대로 따릅니다.
우리는 한 인간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사소한 식사 메뉴를 정하는데도 항상 남에게 먼저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잘 여쭤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말씀을 잘 듣고 그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 기도로 청하고 지혜 구해야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주님으로부터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대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분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심지어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합니다.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먼저 그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결정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먼저 달려가서 그분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지혜를 구할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매우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많은 분이 제게 와서 상담하는데 정작 해결책을 이야기하면 따르지 않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해결책을 따르지 않을 거라면 왜 찾아와서 해결책을 달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최종 선택은 본인의 몫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를 요청하거나 상담을 할 때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답을 기대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도 비슷한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지혜롭고, 올바른 분별을 줘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이 글 제일 앞에서 언급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어머니께서 맛있는 밥상을 차려 놓으시고 밥을 먹으라고 부르십니다. 이때 밥을 먹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밥은 억지로 먹여줄 수 없습니다. 음식 맛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야 합니다. 입안에만 넣고 우물거리면 밥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씹어서 먹어야 소화가 되고, 소화되어야 영양분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예수님은 우리 평신도들의 삶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합니다. “정말 새롭게 살고 싶습니다. 주님이 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동기를 유발하실 뿐이지, 직접 살아가는 것은 우리 평신도 각자의 몫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밥상은 이미 예수님께서 잘 차려 주셨습니다. 그 밥상에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잘 소화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난해하고 힘들고 어려운 것을 주문하시지 않습니다. 어려운 길을 걷는 자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계명을 지켜라. 내 말을 들어라. 그러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셔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중삼중으로 완벽한 장치를 해 놓고,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자신의 내면 들여다보기
혹시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자신의 내면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과연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고 있는지,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고 싶은 의지가 내게 있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등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의지와 노력이 부족하면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나서 분명히 자신의 문제점을 고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내 모습을 그분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뉘우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다음 호에서 이 회개의 문제에 대해 복음화와 관련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가톨릭평화신문 2019.07.28 발행 [1525호] 사목영성 논고 전재